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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6월 28일
진짜 글을 쓰는 사람이나, 아니면 나처럼 그저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어쨋든 컴퓨터로 뭔가 쓰는 사람에게 가장 주요한 입력 도구는 키보드다. 물론 도구가 좋다고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모나미 153으로 쓴거냐, 몽블랑 카프카로 쓴거냐 하는 문제는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쓴거냐에 비하자면 독자 입장에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이건 어디까지나 쓰는 사람 입장에서의 고독한 문제다. 도구를 찾아내고, 도구를 고정시키고, 안정되는 것. 사실 오랫동안 전방위에 걸쳐 이런 것들을 찾아 다니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찾는 과정에서 아마도 뭔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다. 맘에 쏙 드는 편안한 도구를 지니고, 도구를 집는 순간부터 약간이라도 더 집중할 수 있다면 나같은 범인에게는 좋은 모티베이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사실 가격의 상하나 품질의 고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관심과 취향의 문제다. 만년필의 드넓은 세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키보드의 세계에도 테크니션들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근사한 장치들이 숨어 있고, 오래된 모델일수록 그런 감흥을 만날 기회는 많아진다. 가끔씩 그냥 키보드가 두드리고 싶어서 뭔가 쓸 경우가 있다. 한참 예전에는 그저 한글 3.0을 띄어놓고 끄적거리다가 디스켓에 넣어두고 어느날 분실되는 일들을 반복했었다. 요새는 이 넓은 넷의 세상 어딘가에 또 쓸모없는 스토리지를 잡아먹고, 전체 인터넷의 효율성을 조금이나마 낮추는데 기여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_-)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종류의 키보드가 있고, 그 중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키보드들도 수도 없이 있다. 여기서 그걸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내가 다 사용해 본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기준을 딱 두개만 정해서 몇가지를 추려봤다. 하나는 구할 수 있는 것, 또 하나는 사용해 본 것. 물론 구하기 무척이나 어려운 것들도 있고, 아주 잠깐 사용해 봤지만 인상적이었던 것들도 있다.
일단 재미도 없고 문장 만으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키보드의 방식 소개를 먼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원 내외의 키보드는(여러 기능이 붙어 조금 더 비싼 키보드들도) 멤브레인이라는 방식이다. 뜯어보면 안에 은박이 붙어있는 비닐이 있고 키캡이 둥그런 고무를 눌러 컴퓨터가 뭘 눌렀는지 인식하게 한다. 이게 현재 키보드의 주류다. 이 방식이 키보드 시장을 석권한 이유는 가격이 싸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기계식 키보드는 키 하나마다 스위치가 하나씩 붙어있는 방식이다. 안에 커다란 기판이 있고 그곳에 스위치가 103개, 109개 혹은 더 많이 납땜되어 붙어있다. 크게 클릭, 넌클릭, 리니어로 분류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 본체에 붙어있는 파워 스위치나 리셋 스위치를 천천히 눌러보면 처음엔 아무런 압력도 없이 스르륵 밀려 들어가다가 딸깍하는 느낌이 들면서 컴퓨터가 켜지거나 리셋이 된다. 딸깍 할때 소리가 나면 클릭, 느낌만 나면 넌클릭이다. 리니어는 멤브레인 처럼 끝까지 스르륵 밀려가는 방식이다. 이거 말고도 정전 용량 방식, 버클링(이건 입력 방식은 아니지만) 등등이 있는데 일단은 생략. 체리나 알프스의 스위치라면 대게 큰 문제가 없다. 스위치 방식이나 여러 엔지니어링한 부분에 대해선 다음 사이트의 팁앤테크 게시판을 참조할 만하다. http://www.kbdmania.net/board/zboard.php?id=tipntech
그리고 키캡에 세겨진 글자의 인쇄 방식이 다르다. 승화 인쇄, 이색 사출, 레이저 각인, 실크 스크린 등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선 훨씬 더 잘 설명되어 있는 다음 블로그 참고. 글자가 좀 두꺼운게 좋다면 이색 사출이나 승화 인쇄가 추천할 만하지만 레이저 인쇄도 나쁘지 않다. http://curio.egloos.com/966283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생긴 것들은 다 비슷하다. 키를 두드릴때의 느낌, 감흥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어떤 느낌인지 같은 감상은 빼고, 종류가 무엇 무엇이 나오는지, 가격은 어느 정도인지만 써놓는다. 일단은 어떻게든 한번 사용해 보고, 선택하는게 중요하다. 일단 구입해 쓰기 시작하면 별일 없으면 10년 넘게 너끈히 사용할 수 있으니까 오래 사용할 만년필을 고르는 기분으로 천천히 자신을 기다리는 키보드를 찾아나서는게 순서다.
체리 3000 오래된 모델의 키보드라 클릭, 넌클릭, 리니어 그리고 레이저 인쇄, 이색 사출 등등, 101키, 103키, 109키 등등 거의 모든 방식을 찾을 수 있다. 지금 정식으로 수입되는건 콘트롤과 알트키 사이에 윈도우즈키가 붙어있는 표준적인 109키 방식. 하얀색은 클릭, 넌클릭에 레이저 각인, 검정색은 클릭, 넌클릭에 레이저 각인, 이색 사출 버전을 구입할 수 있다. 레이저 각인이 10만원이 조금 안되고 이색 사출은 13만원대. 같은 스위치를 사용했지만 좀 더 모던한 형태로 일본 필코에서 나온 마제스터치도 있다. 이건 좀 날렵해서 나는 별로인데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평범한 버전이면 정가가 11만원이다. 요새 텐키리스 버전(키보드 오른쪽의 숫자판이 없는 형태)도 나왔는데 이건 13만원. 윈도우즈키가 없어도 상관없고, 만약 구하는게 가능하다면 오래된 버전일 수록 더 좋다. 깨끗한 제품을 구할 확률은 낮아지지만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재료들을 사용해서 만들었다. 또 만약 더 뒤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3000이 아니라 1000을 구하는게 더 좋다.
IBM M시리즈 이건 버클링 방식이라고 해서 타자기(까지는 아니지만)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키보드다. 미국인들은 클릭키 키보드라고 부른다. 상당히 오랫동안 출시된거라 여러가지 버전이 있고,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구입하기 전에 어떤 버전인지 잘 알아봐야 한다. 이것 역시 오래된게 좋고, 90년대 초에 미국에서 만들어진게 좋다. 80년대 버전은 좋기는 한데 평범한 피씨 라이터가 쓰기엔 조금 많은 귀찮음을 참아야 하고 엔지니어링 상식과 납땜 기술이 요구된다.(개조가 필요하다) 그다지 비싸진 않지만 요란한 소리와 무거운 무게 때문에 호불호가 조금 갈린다.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만 한데 메인으로 사용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싶다. 제품 상태에 따라 다른데 예전에는 중고를 대충 4-5만원 정도에 구할 수 있었다. 요새는 얼마쯤 하는지 잘 모르겠다. 만약 꼭 새거를 가지고 싶다면, 거기다가 예를 들어 93년도 미국에서 나온 이런 저런 특징이 있는 새것을 찾고 싶어~ 등등 자세히 들어가면 이야기가 많이 복잡해진다.
체리 11900 지금 사용하고 있는 키보드다. 3년쯤 됐다. 이건 오른쪽 아래에 터치 패드가 붙어있는 버전인데, 트랙볼이 붙어있는 11800도 있고, 아무것도 없는 1800도 있다. 11900은 리니어만 나오고 11800은 넌클릭이 많은데 스위치 형태에 따라 키감이 조금씩 다르다. 표준 방식으로 생긴게 아니라서 약간의 적응 기간이 필요하지만 왔다 갔다 손을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다. 이색 사출 버전, 레이저 버전이 있다. 컴팩에서 11800이 번들로 나온게 있었는데 이것도 꽤 좋다. 이건 정식으로 들어온게 없지만 대충 7~10만원 정도에 구할 수 있다. 1800은 레이저 버전만 클릭과 넌클릭이 정식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12만원이다. 아래 사진은 11800과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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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1080 꽤 오래전에 나왔던 모델인데 몇년전에 소비자 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의해 생산된 적이 있다. 지금도 새 제품을 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7만원 정도 한다. 이색 사출 방식이고 윈도우즈 키가 없는 구형 배열이다. 무척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키 스위치가 알프스나 체리와는 약간 다른 방식이라 느낌이 약간 다르다. 이건 말로 하기가 어려운데 써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완전 분해가 안되기 때문에 완벽한 청소가 불가능하다는게 단점. 애플 쓰다가 IBM 컴으로 바꿨을때 처음 사용한 키보드이고, 무려 12년을 썼기 때문에 나에게는 표준적인 키보드다. 대부분의 수입산 이색 사출 키보드가 영문만 사출되어 있고 한글은 레이저 등으로 따로 인쇄된게 대부분인데 이건 한글도 이색 사출로 박혀있다.
리얼포스 정전 용량 방식의 키보드. 기계식과는 느낌이 조금 다른, 상당히 차분하게 타이핑을 할 수 있다. 승화 인쇄 방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커다란 알트키와 콘트롤키 등 예전부터 컴퓨터를 사용해 온 사람에게 익숙한 키 배열이다. 새걸로 구할 수 있다는 점과 약간 재미있는 악세서리들(빨간색 ESC 키캡이라든가 등등)이 있다는게 장점이고, 26만원이나 한다는게 단점이다.
델 AT101 예전 델 마크가 붙어 있는, 흔히 올드델이라고 불리는 키보드는 정말 구석 구석까지 신경써서 만들어진 최고의 키보드 중 하나다. 구하기 무척 어렵지만 구할 수 있다. 상태 좋은걸 구하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에 애써서 구해 봤는데 실망만 클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새거, 혹은 잘 관리된 올드델을 구했다면 그를 위해 애쓴 값어치는 충분히 한다. 키보드를 뒤집으면 숫자가 써있는 스티커가 붙어있는데 42635, 43197, 14140 이렇게 세가지 숫자가 써있는 버전이 간편하게 연결만 하면 쓸 수 있는 버전이다. 나머지는 좀 복잡한 뒤치닥거리가 필요하다. 예전에 비하면 가격은 엄청나게 많이 내렸는데 문제는 물건이 많이 있지가 않다. 관심이 있다면 가만히 신경끄고 있다가 어느날 문득 눈앞에 나타나면, 그때 구입하면 된다.
이 모델과 구형 체리 3000의 103키 모델 새걸 구해보려고 한때는 꽤 집착했었지만 뉴 인어 박스(NIB)가 세상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믿고 있고, 언젠간 나타나겠지 하며 잊어먹고 살고 있다. 삶의 조그마한 기다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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